병인박해(1866년) 순교자

정은 바오로는 신유박해가 끝난 지 3년 후인 1804년에 태어났습니다.

천주교 신자인 사촌 형(이기양, 정섭, 정옥)들이 유배되거나 사망한 터였으므로 그들에게 직접 교리를 배우지는 못하였습니다. 성장한 뒤 자신의 등창을 치료해 주던 조사옥이라는 의원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고 그가 입교한 뒤 모친인 허 데레사와 부인 홍 마리아도 모두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는 단내 교우촌에서 가정을 중심으로 신앙을 지키며 복음의 씨앗을 이웃에게 나누던 성실한 교우였습니다.
당시 단내는 숨어서 신앙을 이어가야 했던 시절이었으나, 정은 바오로는 가족이 곧 신앙의 터전임을 믿고 자녀와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며 공동체를 돌보았습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며 생활하던 중1866년 병인박해고 정은 바오로도 역시 천주교 신자로 고발되었고 음력 11월 13일 집으로 들이닥친 포졸들에게 잡히게 됩니다. 정은 바오로는 “잡혔으면 가야지, 주님이 나를 부르시는데 아니 가고 어쩌겠는가.” 하시며 태연히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음력 12월 8일 여러 교우와 함께 백지사(白紙死:죄인의 손을 뒤로 묵고 상투를 풀어서 결박된 손에 묶어서 얼굴을 하늘로 향하게 하고 얼굴에 물을 뿜고 그 위에 백지를 붙여 숨이 막히게 하여 죽이는 것이다. 당시 대원군 때에는 너무 많은 천주교인을 잡아 죽이게 되므로, 포졸들이 사람을 죽이는 데에 진저리를 내게 되어 얼굴에 물을 뿌리고 그 위에 백지를 발라 숨이 막혀 죽게 하는 백지사가 유행하였었다. 곧, 사람을 죽이는데 염증을 느낀 포청의 형졸들이 피를 보지 않고 사람을 쉽게 죽이는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백지사였던 것이다)로 순교합니다.

이렇게 순교한 교유들의 시체는 남한산성 동문(東門) 밖 개울가에 버렸는데, 수십일 혹은 수개월 동안 버려져 있었기에 많이 상한 시체도 있었다고 합니다.

정은 바오로가 광주 영문에 잡혀가시자마자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고 포졸들은 남아있는 식구를 잡으려고 날마다 찾아왔습니다. 결국, 남은 식구들은 눈 덮인 산으로 피신해, ‘검은바위’나 ‘옥시울 양지골’, 그리고 기록에는 안 나오지만 후손들의 구전을 통해 전해오는 장소인 ‘굴바위’에서 은신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년놈들을 내쫓든지 아니면 모두 잡혀가 몰살을 하든지 해야지, 이거야 원 동네가 시끄러워서 살 수 있나. 그 년놈들을 집에다 숨겨주고 밥을 주는 놈이 누구냐? 그놈부터 내쫓아야겠다.”라고 악담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 정은 바오로가 치명하셨다는 소식을 듣자 아들 일동 방지거와 수동 필립보는 남한산성 동문 밖에 버려진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달라고 매부 박서방의 8촌 박선여에게 부탁을 합니다. 생사가 왔다 갔다 하는 일이기에 고민 끝에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 박선여는 낮에 동문 밖으로 갑니다. 그리고 낭떠러지 바위 밑에 굴러떨어져 있는 정은 바오로의 시신을 발견하고는 풀을 베어 덮고 큰 돌로 표시를 해 둡니다. 밤이 되어 아들 둘은 낮에 표시해 준 아버지의 시신을 찾아 둘러메고 이곳 단내에 와 산소에 모셨습니다. 이후 남은 가족들은 고향 단내를 떠나 30여 년을 산속으로 옮겨 다니며 살다가 1900년이 되어서야 다시 고향 단내로 들어로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이곳에서 살고 있습니다.

성가정 성지에는 정은 바오로와 정양묵 베드로 순교자 묘소와 정은 바오로 가족들이 숨어지내던 ‘검은바위’, ‘옥시울 양지골’, ‘굴바위’가 그대로 남아있어 순례길을 따라 과거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숨어 지냈던 피신처의 모습을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현재, 정은 바오로는 재종손 정양묵 베드로와 함께 2013년 3월 5일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선정되어 시복의 영광을 기원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로 살아, 하느님 안에서 죽으리라.”